영화 '로비' 주연 배우 겸 감독 하정우. /사진=쇼박스
"원래는 우아하던 사람들도 골프채만 잡으면 이상하게 변하더라고요. 백 원짜리 내기에 목숨을 걸고 안 풀리면 갑자기 집에 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고급스러운 골프장에서 남자들이 마치 자치기하는 어린애들처럼 변하는 게 너무 웃겼습니다."
2일 서울 강남구 쇼박스에서 만난 영화 '로비' 주연 배우 겸 감독 하정우는 골프를 칠 때면 돌변하는 남자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2020년 처음 골프를 배웠다는 하정우는 자신 역시 골프를 잘 쳤는지에 따라 그날 기분이 달라지기도 했다면서 "남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골프로 자존심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건 아동심리학을 통해서만 이유를 밝힐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이날 개봉한 '로비'에도 골프 때문에 유치해지는 남자가 나온다. 국토교통부 실세 최 실장(김의성 분)이다. 국책 사업을 따내기 위해 그를 접대해야 하는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은 최 실장이 게임에서 이기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하정우는 한 친구에게서 로비 골프의 세계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시나리오를 확장해나갔다.
그는 "공무원, 판·검사, 언론인, 사기업 대표, 연예인 등 평소엔 절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골프장에서 만나 하루를 보내며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면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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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비' 속 한 장면. /사진=쇼박스
영화에는 국토교통부 일인자 조 장관(강말금)과 그를 접대하는 창욱의 경쟁 업체 대표 광우(박병은), 여성 프로골퍼 진 프로(강해림), 로비에 일가견 있는 박 기자(이동휘), 국민 배우 마태수(최시원), 골프장 대표(박해수)와 그의 아내 다미(차주영)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대사를 주고받되 노림수가 뻔히 보이는 코믹 요소는 넣지 않으려 했다고 하정우는 강조했다. 이를 위해 촬영 전 대본 리딩만 수십번을 거쳤다고 한다.
"배우들이 마음껏 대사를 만들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미리 대사를 만들어와도 되고, 애드리브도 실컷 해도 된다고 했죠. 이후 리딩을 거치면서 핵심적인 대사만 남겼고요. 다만 배우들에게 요구한 한 가지는 연기를 최대한 무표정으로, 무심하게 툭툭 던져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인물들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덕분에 '로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대사들로 가득하다. 관객은 웃기지만 정작 영화 속 캐릭터들은 웃긴 상황이 아니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 고위층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 성격이 강해 하정우의 연출 데뷔작인 '롤러코스터'(2013)가 연상되기도 한다.
하정우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면 아드레날린이 나온다"며 "제가 재미있어하는 영화들이 블랙코미디이다 보니 연출을 할 때도 이런 작품에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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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비' 속 한 장면. /사진=쇼박스
그가 두 번째 연출작 '허삼관'(2015) 이후 세 번째 작품인 '로비'를 선보이기까지 꼭 10년이 걸린 이유도 어떤 작품을 좋아하고 잘 만들 수 있을지 모색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출자로서 신중해진 것 같아요. 지난 10년은 배우로서 현장 경험을 쌓고 다른 감독들을 보며 배운 시간이었어요. 감독으로서 저의 '노선'도 정하고 담금질한 거죠. 제가 다른 감독님들에 비해 내세울 것은 경험이 많다는 겁니다. 촬영 때 아무리 변수가 많이 생겨도 어떻게 대처하고 현장을 끌어나갈지 알거든요."
그 덕인지 네 번째 연출작인 '윗집 사람들'은 '로비' 촬영을 마친 지 2년도 지나지 않은 올해 초 촬영을 끝냈다. 층간 소음을 겪는 윗집 부부와 아랫집 부부가 저녁 식사를 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로, 이 작품 역시 블랙코미디 성격을 띤다. 하정우와 공효진, 이하늬, 김동욱 등이 출연한다.
하정우는 "연출작을 내놓는다는 게 부담되고 공포스럽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가슴 뛰고 신나는 일"이라며 "앞으로 다섯번째, 여섯번째 작품이 어떤 게 나올지 저도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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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비' 속 한 장면. /사진=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