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통신

"진짜 일어난 일"...말레이 '숙청 대학살' 생존자의 증언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남동쪽으로 차를 타고 산을 여러 차례 넘다 보면 셈빌란주 화인(華人) 마을 티티가 나온다. 지난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당시 말라야를 침략했다. 3년 8개월에 달하는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군은 현지 화인에 대해 반인륜적인 '숙청 대학살'을 저질렀다.

신화통신 2026. 9. 18.

(쿠알라룸푸르=신화통신)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남동쪽으로 차를 타고 산을 여러 차례 넘다 보면 셈빌란주 화인(華人) 마을 티티가 나온다.

지난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당시 말라야를 침략했다. 3년 8개월에 달하는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군은 현지 화인에 대해 반인륜적인 '숙청 대학살'을 저질렀다.

1942년 3월 18일 일본군은 티티에 위치한 위랑랑(젤룬동) 마을에서 무차별적 학살을 감행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현지 화인 지역사회의 통계에 따르면 이날 무고한 민간인 1천47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말라야를 지배하는 동안 일본군이 단 하루 만에 가장 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낸 학살 사건이다.

지난 8월 28일 말레이시아 셈빌란주에 위치한 화인(華人) 마을 티티(知知港)에 세워진 '젤룬동(余朗朗) 중국동포 희생자 기념비'. (사진/신화통신)

옹리앙킷(王亮傑) 말레이시아 셈빌란주 화인문화역사 전문가는 "말레이시아 각지의 화인 지역사회는 중국의 항일 전쟁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면서 "화인 지역사회의 자금 모금, 자선 공연, 항전 지원을 위해 본국으로 돌아간 난양(南洋) 의용단 등은 모두 일본군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군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검증' 또는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수색, 체포, 학살을 자행한 것은 주로 항일 활동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화인을 겨냥한 것이지만 실제 피해자 중에는 노약자, 부녀자, 어린이 등도 포함됐다며 "심지어 일본군의 '의심'을 받는 마을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학살 대상이 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8월 28일 기자 인터뷰 중인 옹리앙킷(王亮傑) 말레이시아 셈빌란주 화인문화역사 전문가. (사진/신화통신)

이런 참상은 위랑랑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42년 3월 한 달 동안 일본군은 셈빌란주 각지에서 20건 이상의 학살을 저질렀다. 희생자는 5천 명에 육박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학계 인사는 완전한 서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 실제 희생자는 더 많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8월 27일 시오자오디(蕭招娣)가 당시의 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신화통신)

"할머니, 언니, 여동생, 고모, 어머니까지 모두 일본군에게 찔려 죽었습니다." 구순을 넘은 시오자오디(蕭招娣)는 다시 한번 그때의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시오자오디는 84년 전 참혹했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최대한 희석하거나 부인하고 있다.

"그 동안 수없이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사람을 죽인 적이 없대요. 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시오자오디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이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탄치셍 말레이시아과학대학교(USM) 인문대학 역사학과 주임은 "1995년 일본 정부의 '무라야마 담화'에는 식민 통치와 침략 역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가 담겨 있다"면서 문제는 이런 원칙이 장기적으로 역사 교육, 기록물 공개, 구체적 사건에 대한 연구에 반영되고 있느냐 하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1984년 말레이시아 셈빌란주 중화대회당(中華大會堂)은 일제강점기 셈빌란주 화인 희생자 사료수집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의 증언을 정리·기록해 1988년 '일제강점기 셈빌란주 화인 수난 사료'를 출간했다.

시오자오디가 8월 27일 티티에서 '일제강점기 셈빌란주 화인 수난 사료'를 열람하고 있다. (사진/신화통신)

"전부 진실입니다. 여기에 담긴 것은 모두 진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책을 도쿄에 가져가 그들에게 보여줄 겁니다." '일제강점기 셈빌란주 화인 수난 사료'를 손에 든 시오자오디의 말이다.